예배와 설교. 삶을 생각하며 -22.2월 둘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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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1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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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설교, 삶을 생각하며
 
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다. 죄인을 꾸짖고 책망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위로하며 어루만지고 그의 삶을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이다.
설교는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얄팍한 말재주나 웅변술을 가지고도 안된다.
생명의 역사가 없는 것은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의 능력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목사의 설교가 갖는 그 생명력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경건과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목사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의 그릇에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채워 넣어 강단에서 외칠 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언제나 설교에 대한 고민이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대로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이 고민에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한다.
 
시대는 귀로만 듣는 시대는 지났다.
귀로 듣기만 하면서도 감동을 받았던 ‘라디오 시대’는 지나간 지 벌써 오래 되었고,
보고 듣는 ‘TV시대’를 지나, 어디에서든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대화하고 서로 느낄 수 있는
‘메타버스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숨 가쁘게 변화하는 시대에 교회는 여전히 지난 시대의 향수에 젖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다가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을 첨단을 걸어가는 세속 문화에 다 빼앗기고,
교회는 지금의 우리들만 남게 될 것이다.
 
떤 남자 환자에게 의사가 검사결과를 말했다“수술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왜요?” “글쎄, 선생님 뱃속에 3개월 된 아이가 있습니다.”
이 남자는 귀찮다고 자기 부인의 소변을 받아오게 해서 검사하게 한 것이다.
물론 지어낸 우스갯 소리일 것이다.
자신의 병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자기 소변을 검사해야 한다는 것은 유치원생도 아는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런 상식을 얼마나 무시하고 사는지 모른다.
무슨 사고나 문제가 터지면 으레 먼저 남 탓을 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고친다는 방법까지 다 잘 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그 고침의 대상이 되어야 할 때는 뒤로 쏙 빠지고 너만 고치라고 하기 때문이다.
남이 잘못하는 것은 그렇게 비판도 잘하는데 자신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너그럽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잘못한 것을 지금도 그대로 잘못하고 있다.
이제 2022년에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의 예배와 성도의 삶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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