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세기 5장 1-32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아담의 족보입니다. 아담의 족보에서 중요한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닮았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대리하여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죄가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들어왔고 그 죄가 확대 강화되는 모습을 가인의 계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죄의 영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선포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과 사람에게 '다스리라' 라고 선언하신 그 명령은 취소되지 않고 불완전하지만 실현과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인과 셋의 계보를 통해 알게 됩니다.
창세기 5장은 셋의 족보로 4장에 기록된 가인의 족보와 비교될 수 밖에 없고,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차이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수명에 관한 언급입니다. 가인의 족보에는 수명에 대한 언급이 없고, 셋의 족보에는 그들의 나이를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오래 살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받아들이면 모세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의 후손들이 장수를 누린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허락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족보와 비교해서 셋의 족보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에녹'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더라'라는 기록입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명 나무 과실에 접근을 원칙적으로 차단하시고 그로 인해 사람은 '영원히' 살 길이 막혔습니다. 죄로 인한 죽음을 사람이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셋의 후손들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셋의 후손들에게 오래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하나님의 복의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가인의 족보는 문명과 문화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그 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임을 강조하고 살인으로 종결합니다. 이에 반해 셋의 족보는 가인의 족보에서 보이는 문명과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하나님의 관심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셋의 족보는 창세기 1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지음 받은 사람, 그리고 남녀에게 주신 복의 선언과 복으로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들을 다시 기록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번영과 발전에 주목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가심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셋의 족보를 전해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최고의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던 고대 이집트! 수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고 그 속에 거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여 쌓아 올린 인간의 문명과 문화를 통해 일하지 않으심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문명과 문화를 이어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와 전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광야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집트를 사용하시는 것이 더 현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이집트를 전복시키고 이집트의 자원과 문명과 문화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수월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문명과 문화의 진보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통치 아래 살아가다 그 마지막이 멸망인 사람들을 건져내어 회복케하고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음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보면 이집트는 모든 것이 광야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다 갖추어진 곳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 머무는 광야는 모든 것이 낯설고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계시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은 광야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후 성경의 기록은 아브라함으로 출발한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약자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고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생활을 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서거나 문명과 문화를 이끌어간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변방의 작은 한 나라에 불과했고 여러 문화에 영향을 받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지역에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성경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대 중요한 사건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일들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성경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어떻게 미치는가에 있습니다. 또한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영향력 아래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왜곡되고 부족하여 신음하는 세상을 어떻게 회복케하시는 가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도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 상태였고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회복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를 통해 죄와 사망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은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설 것 같았지만 현실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변두리에 살았고 예수님으로 인해 사회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오히려 박해받고 죽음에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힘없는 사람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 나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음에 무력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기보다는 걸림이 된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힘을 키워야 한다고 세상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힘으로, 세상의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지 않으시고 이집트를 전복시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로마의 병정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로마를 복속시키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능력이 없으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못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연약한 나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영향력도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세상 방식과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겠다고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목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세상을 돌보며 치유하는 삶의 발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삶의 발걸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나아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오늘 나는 가인의 후손처럼 세상의 성공과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셋의 후손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2.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세상에 속해 살아가지만 내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내 삶에 성취된 것들이 있습니까?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내 삶 속에서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까?
묵상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삶이 가인의 후손들이 걸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성을 쌓고 세상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선택과 결정들을 통해 죄와 사망의 통치가 확대되거나 강화되지 않게 하시고, 셋의 후손들이 살아갔던 삶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