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하는 기준
고난과 아픔의 시간은 하나님이 나를 떠나거나 버리신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다.
고난을 겪는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고 버리신 자고, 고난이 없고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고난을 통해 사랑하는 자와 버린 자를 나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형통과 평탄함, 부요와 축복만으로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으신다.
아픔과 어려움 중에 함께 하며 도우시고, 고통 중에 위로와 소망을 주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드러내신다. 고난이라는 확성기를 사용하여 우리를 일깨우시고,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마음을 들려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하는 기준은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소망의 유무다.
고난 중에도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고난과 아픔을 겪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고 떠나셨다’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섭섭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다.
고난 중에 가장 두렵고 위험한 것은 고독감이다.
문제만으로도 버겁고 어려운데,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무너뜨리는 가장 큰 함정은
‘나는 버림받았다, 모두가 나를 떠나가고 나 홀로 남았다, 난 혼자다’라는 처절한 고독감이다.
마귀는 당신에게 찾아온 고난과 아픔을 이용해 하나님과 당신을 이별하게 만든다.
마귀의 비열한 수작이 바로 당신의 마음에 고독감과 외로움을 심어 하나님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불안감을 심어주어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케 하고 하나님과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마귀의 간교한 계략에 넘어가면 안 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난은 실패와 손해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유익의 시간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오히려 더욱 굳세게 하신다.
하나님은 내게 닥친 고난만 간신히 이겨내고 벗어나게 하시는 게 아니라, 고난을 통해 나를 이전보다 굳세게 하시고 강하고 존귀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다.
요셉의 고난은 죽을 것 같은 아픔이었고, 다윗이 골리앗을 만난 것은 처절한 생존 문제였으며,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맞닥뜨린 시퍼런 홍해 바다는 진퇴양난의 위기였다.
그런데 그 결론을 보라. 요셉은 고난 때문에 총리가 되었고,
다윗은 골리앗을 대적한 그 사건으로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두려운 홍해는 바로의 철병거, 즉 지긋지긋하게 나를 따라오며 놓아주지 않던 과거의 모든 문제, 죄의 습성, 나를 노예로 잡고 있던 그 과거가 수장되는 무덤이 되었다.
고난의 목적은 그 고난 때문에 내가 손해만 보거나, 고난만 간당간당 이겨내고 겨우 통과해서 살아남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 큰 그림을 가지고 고난을 통해 나를 더 굳세고 존귀하게 하시며, 우리를 부흥시키신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자를 신뢰해야 한다.
사랑은 믿음이다. 믿는 게 사랑이고, 사랑하는 게 신뢰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주시는 것이 내게 선하고 유익함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사랑도 믿으라. 그분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열이 38도까지 오르는데도 아기가 입을 앙다물고 쓴 약을 거부하자
결국 엄마는 아기의 팔다리를 잡아 꼼짝 못 하게 하고 입을 강제로 벌려서 억지로 약을 먹였다.
충격을 받은 아기는 생각한다 .
‘드디어 올 게 왔다. 이 아줌마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내 엄마는 어딘가 다른 곳에 계신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고난은 죽을 것같이 써서 먹고 싶지 않지만, 그것 때문에 살아나는 것이다.
쓴 약을 먹이는 부모의 마음이 바로 그러한 사랑이다.
아내가 내게 홍삼을 챙겨준다. 이것도 쓰다. 차라리 콜라를 챙겨주면 좋겠다.
하지만 홍삼이 쓰더라도 나에게 좋은 것이라서 주는 것이 사랑이고, 또한 그것을 먹는 믿음이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신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
그러니 그분이 주시는 것이 내게 가장 선한 것임을 믿으며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