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수 있는 사람들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어떤 자극으로 흐르는 생리적인 눈물과 슬픈 영화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흘리는 정서적 눈물이 있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을 대상으로 과학적 연구가 처음 시도된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프랑스 화학자 라브와지에가 연구를 시작한 이후 여러 학자들이 눈물에는 염화나트륨, 염화칼륨, 칼슘, 망간 등이 함유돼 있으며, 눈물의 나트륨 농도가 혈액의 농도와 같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20세기 초에는 미국의 한 학자가 77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54명의 환자가 실컷 울고 난 다음 건강상태가 훨씬 좋아졌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카타르시스, 곧 정서를 순화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했는데,
영화나 연극을 보고 흘린 ‘정서적 눈물’과 마늘, 양파 등의 냄새를 맡고 흘린
‘생리적 눈물’에 들어있는 화학물질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똑같은 눈물이지만 정서적 눈물에는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생리적 눈물에는 단백질이 아주 적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백질이 정서적 눈물에 더 많이 함유되어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스트레스 해소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시원함을 느낀다.
그 눈물에 온갖 마음의 찌꺼기와 정서적 불순물들이 다 녹아 나오기 때문이다.
눈물은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눈물에는 영적인 눈물도 있다.
영적인 눈물은 하나님 나라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예수님도 이 눈물을 흘리셨다.
성경은 나사로라는 한 인간이 죄에 정복되어 쓰러져있는 그 죽음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나사로 한 개인의 죽음을 슬퍼하신 것만은 아니다.
온 인류가 속수무책으로‘죄와 사망’에게 당하기만 하는 그 가련함을 슬퍼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눈물은 십자가를 앞에 두신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통곡으로 변한다.
온몸으로 온 인류의 눈물을 대신 흘리시고 온 맘으로 모든 인생의 울음을 대신 우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우심을 따라 울어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 밑에까지 와서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울고, 교회를 위해서 울자.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울고, 예수님을 모르고 지옥으로 향하는 우리의 부모, 형제자매, 우리의 자녀를 위해 울자.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에 하나님의 눈물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울며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